어린 시절 해외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지구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작은 나라에서 온 동양의 여자아이였던 나는 어린 나이에 차별을 당했다. 아마도 낯설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라고 저들에게 알려줘야 하나. 내 나라가 가진 것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 고민으로부터 나의 정체성 찾기는 시작됐다.

버선 위에 수놓인 서사

‘버선’의 반듯한 곡선은 나를 닮았다. 그것은 다양한 우리 전통문화의 소재 중 ‘버선’을 가장 먼저 선택한 이유가 됐다. 나름 반듯하게만 살아온 삶을 지나, 나만의 자유로움을 꿈꾸는 현재의 이상향을 곡선에 빗대며 ‘반듯한 곡선’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바로 한국적인 ‘선.’ 이미 여러 매체가 가진 유기적인 특성을 단순화하고, 단순한 복제 혹은 복사가 아닌 그 선과 면의 간결화를 통해 나만의 조형미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평면이 아닌 입체감을 지닌 도자 조형물로서의 버선은 한 폭의 그림을 담는 캔버스가 되었다. 그 위에는 나만의 기억과 소망을 그려 담았다. 그중 전통자수를 모티프로 한 표현은 어린 시절 겪은 인종차별에 대한 나의 정체성 찾기의 방식이 된 것 같다.

캐스팅된 도자 조형의 하얀 표면 위에 안료로 표현된 그림은 한국 전통자수에서 영감을 얻는다. 우리 전통자수의 아름다운 조형과 세련된 색감으로 한 땀 한 땀 새겨진 그림들은 제 색감을 내기 위해 오랜 시간 덧칠되고, 고유의 색을 지켜내며 고온을 견디고 나서야 비로소 화려하게 완성된다. 그렇게 버선 위에 수놓아진 다양한 서사는 나 자신의 기억이자, 발자취이다.  

‘버선 이야기’ 연작은 버선에 꽃을 그리는 것에서 출발했고(2011), 이후 점점 현대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확장된다. 카스텔바쟉과 협업한 ‘버선 이야기-비상’(2017)에서 흰 버선 위에 나의 모란문과 함께 하트 로고와 에펠탑 무늬를 장식했다. 이 작업으로 내가 오히려 한국적인 것에 갇혀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좀 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고민의 흔적을 담아낸 흘러내리는 듯한 추상적인 색과 선이 그려진 ‘버선 이야기-흐름’(2017)은 이와 같은 변화 과정을 보여준다. 이후 ‘버선 이야기-사랑하는 그대에게’(2018), ‘버선 이야기-편지’(2019)에 이르면서 비로소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정체성, 시간을 잇는 공감대 찾기

내 작업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그림의 소재는 꽃이다. 실제로 꽃이라는 소재는 우리 전통자수에서뿐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현대, 동서양에 이르기까지 매우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연구, 활용된다. 한때 일상생활 곳곳에 쓰이는 꽃 패턴들이 꽤 촌스럽게 느껴진 시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그 무늬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꽃이 지닌 매력과 친숙함, 아름다움이 나에게도 보이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 꽃이 나와 어머니를 잇는 공감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꽃의 역할에 주목하며 그 이미지를 조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어머니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아가 스스로 정체성을 찾아 나서 타인과 소통하고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최근에 열린 개인전 제목은 ‘변하지 않는 것들의 위로’(2020)였다. 변화무상한 요즘, 지친 마음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보게 된 자연은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이는 메인 작품 속 천변을 노니는 오리와 함께 붉은 고마리꽃, 보라색 구절초, 초록색 클로버 잎이 어우러진 순간으로 표현했다. 그들은 변하지 않고 시간이 흐르는 대로 항상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우리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네고 있다. 나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물을 통해 나의 시간을, 나아가 동시대를 기록한다. 이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