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나는 어쩌다 내가 됐나 / 주철환,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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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흐르는 강물처럼] 나는 어쩌다 내가 됐나 / 주철환, 프로듀서
  •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Essay

오랜만에 만난 후배나 제자에게서는 거의 동일한 말을 듣는다. “어떻게 늙지를 않으세요.” 세상에 늙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 고마워서 웃음으로 받아들인다. “빈말이라도 듣기 좋네.” 어쩌다 처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도 비슷한 덕담을 건넨다. “늙지 않는 비결이라도 있으세요?” 이쯤 되면 살짝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된다. 

내가 진짜 그렇게 젊어 보이나. 하기야 오십 대 중반에 KBS ‘아침마당’에 출연해서 ‘10년 더 젊게 사는 법’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한 적도 있긴 하다. 내가 우쭐할 때마다 나를 착각의 늪에서 구해주는 분이 계시니 바로 친애하는 나의 아내다. “그걸 믿어?” 결혼 36년째인 우리 부부는 동갑내기다.

오래전 일이다. 아파트 단지에 액자 대여하는 가게가 있었다. 주말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그림 앞에서 주인과 얘기하는 게 보였다. 외출한다는 말을 건네려고 막 들어서는데 주인이 하는 말. “어머 이렇게 장성한 아드님이 계신 줄 몰랐네요.” 그 순간 아내의 표정은 글자 그대로 황당함과 당황함 그 자체였다. 

아들 녀석이 외출하면 난 그의 옷장에서 맘에 드는 것으로 하나 꺼내 입는 일이 잦았다. 신장의 차이 때문에 바지는 못 빌려도 웃옷은 거의 내 사이즈에 맞아서다. 그날도 나는 청바지에 아들의 밝은색 티셔츠를 꺼내 입고 선글라스에 챙 달린 모자를 쓴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꾸몄어도 남편과 자식을 혼동하다니. 의문의 일패를 당한 아내는 겉으로는 웃어넘겼지만 기분이 썩 좋았을 리 없다. 

사실 이런 일화는 최근에도 있었다. 아들 결혼식에 입을 양복을 내가 대신 찾으러 갔는데 직원이 나를 보더니 “본인이세요?”라고 물은 적도 있다. 물론 마스크와 모자가 일조를 하긴 했다. “신랑 아버지예요”라고 답할 때의 쾌감이 무척 좋았지만, 아내에게는 차마 이 미담(?)을 공개하지 않았다. 

젊어 보인다는 건 잘생김과는 무관하다. 잘생긴 건 타고나야 하지만 젊어 보이는 건 습관으로 이룰 수 있다. 문제는 그런 노력을 왜 하냐는 것이다. 하지만 짐작해 보라. 스스로는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데 주변에서는 자꾸 노인으로 대우하려고 한다면 왠지 서글플 것 같다. 말이 대우지 실상은 제외, 아니 소외다. 젊어 보이면 일할 기회도 조금 늘어난다. 나는 일곱 개의 직장에서 일곱 번의 퇴직금을 수령했는데, 마지막 두 번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는 게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추측한다.

이제부터 즐거운 은퇴자의 일상을 공개한다. 나의 하루는 거울과 저울로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관찰한다. 내가 나에게 처음 말을 거는 시간이다. ‘자세히 보면 아름답다’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 순간 잊어야 한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직은 괜찮다. 그래서 주름살이 아니라 구김살 위주로 체크한다. 표정 속의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주문을 불어넣는다. 

저울 위로 올라간다. 기준은 어제의 체중이다. 어제보다 늘어났는지 줄어들었는지 확인한다. 표준은 그해 1월 1일의 체중이다. 많이 줄면 그날은 보충하고 많이 늘면 그날은 소식을 한다. 이렇게 실행한 지 십 년이 넘었다. 그런 후 의자에 앉아 차분히 혈압을 잰다. 의사의 소견대로 80과 120을 목표로 하는데 숫자가 출렁이면 어제의 삶을 한번 돌아본다. 쓸데없는 일에 흥분을 한 건 아닌지, 화내지 않아도 될 일에 분노를 낭비한 건 아닌지 가늠해 본다. 이 세 가지가 오전의 정성평가, 정량평가다. 

물 한 잔 마신 후에는 핸드폰의 일정표에서 오늘 만날 사람을 확인한다. 퇴직한 후에 나는 원칙을 정했다. ‘즐겁지 않으면 만나지 않는다.’ 즐거운 만남이 되려면 나도 즐겁고 상대도 즐거워야 한다. 나는 만나고 싶은데 상대는 원하지 않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상상할 수 있다. 오해나 착각은 경계한다. 만남의 경비는 일단 내가 지출한다는 게 기본이다. 얻어먹기를 즐기면 못 얻어먹을 때가 반드시 오지만, 대접하기를 즐기면 그 만남은 꾸준히 이어진다는 게 내 경험칙이다. 

만남은 직접 만남과 간접 만남으로 구성된다. 그동안 못 읽었던 책, 못 들었던 음악, 못 보았던 영화들을 접하며 그 창작자와 구연자를 만나는 기쁨이 어마어마하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나 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정말이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루가 짧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딱 한 단어가 떠오른다. 감사다. 사실 어떤 음식을 먹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을 먹는지가 더 중요하다. 오늘도 억울하고 분해서 복수심으로 하루를 마감한다면 아침의 내 얼굴은 늙고 낡아 있을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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