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후의 그림카페] 산책의 감각 / 휘리,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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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어느 오후의 그림카페] 산책의 감각 / 휘리, 일러스트레이터
  •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Essay

베란다 창문으로 뒷산의 빛깔이 매일매일 바뀌는 걸 보다가, 한가하고 기온이 좋은 날을 골라냈다. 오랜만에 낮은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풍경을 관찰했다. 오랜만에 산책 겸 나온 동네 산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사진과 영상을 찍느라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을 새가 없었다. 팔랑팔랑 바람에 반응하는 나무의 움직임이 굉장했다. 매력적인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휴대전화 카메라로 소중히 현장을 담았다.

집으로 돌아와 종이를 앞에 두고 앉았다. 멋진 장면을 많이 보고 난 직후이니, 무언가 그리고 싶다는 욕망도 강하게 올라와 있었다. 기분 좋게 기억을 더듬다가 자연스럽게 사진첩을 열었다. 사진과 영상들은 틀림없이 멋지게 찍혀 있었다. 그런데 사진 몇 장을 살펴보던 중, ‘아차’ 싶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크게 놓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멋지고 흥미로운 무언가를 볼 때, 습관적으로 그 즉시 사진을 찍었다. 물론, 그렇게 남긴 사진이 작업을 위한 좋은 자료가 되고 기억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휴대전화 사진은 점점 기억의 보조를 넘어, 기억력과 감각의 지분까지 빼앗아 가고 있었다.

이제는 사진을 찍은 것이 내가 본 것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제대로 관찰하지 않았어도 사진이 찍혀있으면 제대로 보았다고 착각하고, 어느 날은 제대로 보았어도 사진이 없으면 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개인의 기억들은 내게 들어와 정리되기 전에, 사진첩 속에서 섞여 자기들끼리 어수선해졌다. 더 이상 휴대전화가 없었던 때처럼 세상을 느끼기 어렵다는 걸 새삼 체감했고, 순간 아찔하기까지 했다. 바로 사진첩을 닫아버리고 산책의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아니, 그저 예전에 하던 걸 그대로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어쩌면 정말 간단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음 날은 작은 노트와 연필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어제의 교훈을 상기하며 오늘 하루만큼은 ‘휴대전화를 보거나 사진 찍지 않기’를 규칙으로 두었다. 이전에는 자연스레 하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휴대전화를 습관적으로 만지지 않기 위해 큰 노력을 해야만 했다. 사진으로 자료를 남기지 못하고, 이만큼 멋진 것을 보았다고 인증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돌아온 보상은 아주 확실했다. 

바로 ‘산책의 감각.’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아쉬워, 눈을 최대한 적게 깜빡이며 지그시 보고 다시 보았다. 일렁이는 그림자를 보다가, 그 주변을 맴도는 잠자리와 함께 비행했고 날개에 떨어지는 빛 때문에 눈을 깜빡였다. 

가까이 있는 것은 컸고 멀리 있는 것은 작았다. 발밑으로는 일정하지 않은 땅을 밟는 내 무게가 자세히 느껴졌다. 내 시야는 직사각형이 아니라 아주 크고 기다란 타원형에 가깝다는 사실도, 참으로 오랜만에 느낀 감각이었다.

나는 이 시간을 통해,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낭비한 시간과 감각이 상당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이 산책의 규칙을 당분간 열심히 지켜볼 생각이다. 내가 뭘 잃어버리고 있는지 알아내고, 되찾아 올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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